금가락지(金家樂地)팬션/김영택 화백 펜화기행

2만 왜군 물리친 진주대첩, 곳곳에 서린 의병의 혼

청정남 2011. 11. 3. 22:16

 

 

 

 

 

 

 

 

 

 

 

 

 

아래의 그림은 파주 후배가 김영택 화백님의 사무실을 방문하여 중앙일보 칼럼으로 나가기

하루전에 미리 구입하였던 그림이다.

 

나 역시 욕심이 났지만 후배에게 양보하고 말았다.

 

24년전 진주 혼자서 남해안을 15일동안 혼자서 여행다닐때 진주성 앞

여인숙에서 하루를 묵었던 곳이다...

 

진주성을 구경하고 남강댐을 구경하였던 추억이 살아나는곳....

 

다시금 방문하고 싶은 고장이다...

 

 

<아래 그림과 글, 사진은 김영택 화백님께서 보내주신 메일을 올렸다....>

 

 

2만 왜군 물리친 진주대첩, 곳곳에 서린 의병의 혼

 

 

 


첫 손자의 작명을 승제 한정훈 선생에게 부탁드렸습니다.
작명소를 운영하지는 않지만 이름만 보고도 문제점을 족집게처럼 맞혀
놀란 적이 여러 번 있었거든요.
생년월일을 보고는 ‘요즈음 태어나는 아이들 사주가 무척 좋은걸 보면
한국이 아주 잘 살게 될 모양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저명한 외국 연구기관이
‘한국이 세계 2대 강국이 될 것.’이라는 연구 결과를 발표한 적도 있습니다.
국운이 좋아서 일까요.
국민의 특성이 강하기 때문일까요.

6.25전쟁 때 주한미군사령관이었던 밴플리트 장군이
“서구 군대는 패하면 뿔뿔이 흩어져 버리는데,
한국군은 패잔병들이 모여 부대를 만들고, 다시 패해도 또 모여 싸운다.”고 하였습니다.
오합지졸이었던 한국군은 이런 정신으로 단련되어
국공내전을 거치며 전투 경험이 쌓인 중공군과 맞겨룰 수 있었던 것입니다.

임진왜란 때 관군이 패하고 임금은 피난을 갔어도
백성들이 의병을 일으켜 나라를 지킵니다.
1592년(선조 25) 10월 2만여 명의 일본군이 진주성을 공격합니다.
조선 관군과 의병 3,800여 명이 6일간의 전투 끝에 이를 물리칩니다.
백성들까지 나서 돌을 던지고 끓는 물을 부으며 싸워서
성안에 기와와 돌이 남아있지 않았답니다.
이를 ‘진주대첩’이라 합니다.

남강변 언덕 위 촉석루는 당시 전투 지휘소였습니다.
고려 1241년(고려 고종 28)에 창건되었습니다.
임진왜란 때 불탄 것을 1618년(광해군 10)에 중건 하였으나
6.25동란 때 다시 불에 타 1960년 다시 지은 것입니다.
정면 5칸, 측면 4칸으로 넓이가 20칸인 큰 누각입니다.
진주성 안에는 임진왜란 유물들이 많습니다.
찬찬이 둘러보며 우리 민족의 미래를 상상해 보세요.

(중앙일보 칼럼에 사진과 설명을 더한 것입니다.)


촉석루는 서장대, 동장대처럼 남장대 라고도 합다.
좌측 작은 건물이 의기 논개의 사당



진주성의 동쪽 입구인 촉석문



촉석루 남쪽 성벽에 작은 문이 있어 강으로 내려갈 수 있습니다.
전투 시 병력의 이동이 가능 했을 것입니다.



촉석루 아래 논개의 비석을 보호하는 비각.
‘의기논개지문’이라는 현판이 있습니다.



논개가 왜적을 껴안고 강으로 뛰어든 ‘의암’
실제 일본 기록에도 '가또 기요마사'의 부하 '게야무로 로쿠스케'가
조선 애인과 물에 빠져 죽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천혜의 요새인 촉석루 남쪽 성벽과 단애.



논개의 영정과 위패를 모신 사당 ‘의기사’
논개는 朱(주)씨 집안 딸로
생년월일이 모두 戌(개)이었답니다.

즉  戌年, 戌月 戌日 戌時에 낳은 것입니다.

이름을 지을 때 ‘낳은 개’라는 뜻의 ‘논개’라 지었다 합니다.
경상도에서는 ‘아이를 낳다’를 ‘아이를 놓다’고 발음을 합니다.
따라서 ‘놓은개’가 ‘논개’가 된 것입니다.
이런 사주는 드물고 무척 강한 사주로 풀이됩니다.
여자의 몸으로 무기도 않쓰고 적장을 죽였으니 강해도 보통 강한 것이 아닐 것입니다.



본래 이당 김은호 화백이 그린 영정이 있었으나
김화백이 ’일제부역자‘라 하여 새로 그렸습니다.
김은호 화백이 그린 그림이 격이 더 높습니다.
앙다문 입술과 눈매에서 의기의 기백이 살아있습니다.
(김은호 화백이 그린 영정을 보여주지 못 해 죄송)


얼굴은 어차피 상상일 것이고,
손가락에 낀 가락지를 유심히 보아야 합니다.
이렇게 여러 개의 가락지를 낀 손을 끼워 맞잡으면
천하장사라도 빠져 나오지 못합니다.


여러분도 부인이나 애인이 여러 개의 반지를 끼고
강가나 바닷가로 놀러 가자고 하면
‘내가 뭔 잘못을 했나?’하는 반성을 해야 목숨을 부지할 수 있습니다.ㅋㅋㅋ
반지를 많이 사는 부인도 조심해야 합니다.
"자나깨나 마누라 조심. 자는 마누라도 다시 보자"



임진왜란 때 의병을 모아 싸우다 순국한 ‘제말’장군과
정유재란에 전사한
그의 조카 ‘제홍록’ 장군 두 분을 모신 사당, 쌍충사.
임진란 때 전국에서 의병이 일어난 것은
기개가 있고 재산에 여유가 있는 양반들이 주동이 되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를 안 일제는 대한제국을 합병하기 전에
양반 세도가들에게 막대한 돈을 주어 의병 활동을 막았습니다.



성내에 있는 진주박물관은 임진왜란 전문 역사박물관입니다.
거북선과 판옥선 모형을 만들어 놓았습니다.

꼭 돌아 보세요.

공짭니다.



임진란 당시 조선 장수가 입던 갑옷.



왜군의 장수가 입었던 갑옷과 조총



대완구(전시대 상단 가운데)와
하단에 전시한 천자총통(보물 제 647호)



중완구(보물 제 858호)와 비격진천뢰(오른 쪽 두개의 철환)
비격진천뢰는 쇠로 만든 구 안에 화약과 철환을 넣고
심지를 달고 완구에 넣고 발사하여 적진에 떨어진 후 터지도록 하였습니다.
왜군들이 무엇인지 궁금하여 모여서 구경을 하다가
폭팔을 하여 혼비백산 하였다고 합니다.

비격진천뢰는 당시 세계최초의 폭팔탄이었습니다.



휴대용 총통



창렬사의 문



2차 진주성 전투에서 순국한 김시민 장군 등 39분을 모신 사당, 창렬사.



창렬사 앞길 단풍



포루
진주성에는 모두 12개소의 포루가 있었습니다.
현재는 한곳만 복원해 놓았습니다.



임진란 때에는 ‘내성사’로 승병의 본거지 였으나
2차 진주성 전투에 순절한 승군을 기리기 위해 ‘호국사’라 하였습니다.



호국사 앞 단풍



서장대
서쪽 지휘소로 본래 2층 누대 였습니다.



대형 총통인 천자총통은 대장군전(제일 뒤 사진)을 쏘았습니다.
사거리 1,130여 미터였습니다.
적의 공성시설을 파괴하는데 사용하였습니다.
지자총통은 장군전이나 조란탄 200발을 발사 했습니다.
조란탄은 현대의 산탄과 비슷하여 대량 살상이 가능 하였습니다.
사거리 약 1,000미터.
가장 작은 현자총통은 차대전이나 조란탄 100발을 쏘았습니다.
총통은 ‘동차’에 실어 이동이 가능 하였습니다.
조선시대의 자주포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서장대와 서문 사이의 성벽



서문 일대에도 단풍이 한참



북장대로 진남루로도 불렀습니다.



영남포정사.
경상남도 관찰사 감영의 정문이었습니다.



군수 이하는 말에서 내려 걸어 들어가라는 하마비.



왼쪽은 진주성 대첩을 지휘한 김시민 장군의 전공비.
오른 쪽은 2차 진주성 전투에서 순국한
7만 민,관군의 충절을 모신 ‘촉석정단충비’ 보호각



진주성의 정문 ‘공북문’



촉석루 강 건너편 대숲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