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아끼는 소장품

내가 가장 아끼는 소장목록 1호-숭례문 펜화...

청정남 2011. 8. 8. 12:00

 

 

 

 

 

 

 

 

 

 

 

 

 

 

 

 

 

내가 가장 아끼는 소장목록 1호...

 

사람이 살다보면 자기가 아끼고 간직하고 싶은 소장품은 다 있을것이다.

 

나는 내가 가지고 있는 소장품은 몇가지 이고

어느것이 가장 가치가 있다고 생각할까?

 

나는 당연코 나의 소장목록 1호는 김영택 화백님께서 펜화로 그린

우리나라 국보1호인 "숭례문"을 꼽는다.

 

 

 우리가족이 남대문과 인연을 맺은지도 45년이 지난것 같다.

 

어머님께서 북창동 시장에서 장사를 하셨고 내가 남대문시장에서

근무하고 사업을 한지도 어느덧 만37년이 넘었다.

 

우리 가족사에 2대를 넘어 우리 조카까지 남대문시장에서

 사업을 하고 있으니 3대에 걸쳐 남대문시장과

 인연을 깊게 맺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남대문에서 은퇴를 하면 뭔가 한가지는

상징적인 것을 가지고 싶었고 남기고 싶었다.

 

 

(나의 소장목록 1호가 거실 가장 눈에 띄는 곳에 당당히 걸려있는 "숭례문" 펜화 원화본...)

 

 

나는 원래 중앙일보를 구독하고 있었는데 김영택 화백님께서

 연재 하시는 펜화기행 그림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다가2007년 남대문 시장내 알파문구,알파 갤러리에서

 김영택 화백님의 펜화 전시회가 열리고 있었다.

 

알파문고 사장님의 초청으로 갤러리에 초대되어

김영택 화백님을 소개받았다.

 

갤러리에 전시 되어있는 좋은  펜화그림을 감상 하였었다.

 

갑자기 펜화 원본을 보는순간, 구매하고 싶은 충동을 억누를수가 없었다.

 

내가 구입하고 싶은  그림은 첫날에 이미  팔렸다.

 

알파문고 사장님의 소개와 김영택 화백님의 추천으로

해남,"미황사"  원화를 그 자리에서 즉시

구매 하였었다.

 

미황사를 구매하기 전까지는 김영택 화백님과는 왕래는 없었다.

 

 해남,"미황사"그림을 새로 산지 얼마 안 되었을때 일이었다.

 

화곡동에서 새로운 사업을 하면서 바쁘다는 핑게로 신문을 읽지못하여

밤 늦은 시간에 내 블로그와 중앙일보 사이트에 들어갔다가

중앙일보에 숭례문 펜화를  연재 하신것을 알았다.

 

 

(아직까지 복원 작업중인 숭례문을 출근 하면서 살짝 찍었다.나는 매일 숭례문을 안볼수가 없다..)

 

숭례문 펜화 그림을 인터넷에서 검색하여 보는 순간

어떤 설레임과 초조함으로 전율이 돌았다.

 

상당히 늦은 시간인 걸로 생각되었다.

 

밤10시가 넘었지만 화백님께서는  전화를 받아 주셨다.

 

 화백님께서는 여러 군데서 숭례문을 구입 하시 겠다는

의사를 타진해 와서 생각해 보겠다고

 말씀을 주셨다.

 

나는 화백님과는 교류도 없었고 펜화그림에 대한

 정보도 없어 난감 하였다.

 

나는 화백님과 대화중에 생각해 보겠다는 의사는

나에게 그림을 주지 않을수도 있다는

 뉘앙스가 깔려 있다고 생각 되어

마음이 무척 초조했다. 

 

 

(가림막으로 가려진 숭례문은 몇년후면 화려하게 우리에게 부활하여 나타 날것이다...)

 

솔직히 나는 숭례문 그림에  너무 꽃혀 있어서  구임을 못하면 어떻게 하나

하는 불안함과 초조함을 가지고 전화를 들였다.

 

나는 그림에 대하여 문외한이고 그림을 그리는 화가도  김화백님이 처음 이었다.

 

숭례문 그림은 그림 값을 매길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갑자기 "오원 장승업"을 소재로한 영화 "취화선"과

장승업의 일대기를  읽은 기억이 떠올랐다.

 

오원 "장승업"은 돈을 떠나서 천한 기생이라도 자기그림을 알아주는 사람은

돈을 마다 않고 공짜로 라도 그림을 주었다고 읽고 보았었다.

 

신문에서도 예술가들은 돈을 떠나 본인이 좋아하는 예술세계를 승화하는

삶을 사시기에 경제적인 삶과는 무관하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그 만큼 나는 그림을 그리는 화가의 세계를 모르니 영화 한편 보고 힌트를 얻어

화백님의 그림을 높게 평가하고  자존심과 존경심을 내보이도록

노력 하려고 애를 쓰려고 하였다.

 

특히 화백님의 자존심이 걸려있는 작품들은 돈으로

 흥정하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나는 솔직히 화백님께 솔직과 감성으로 호소를 드렸었다.

 

다른 사람도 마찬 가지로 화백님의 그림을 좋아하여 구입 하시겠지만

저는 그림을 좋아 하기도 하지만 35년이상을 남대문에서 사업을

하고 있으니 아들에게 물려주고 대대로 가문에게 가보로

넘겨주고 싶으니 기왕이면 저에게 작품의 혜택을

볼수있도록  말씀을 드렸었다.

 

나는 화백님께 다른 사람보다는 남대문에서 사업을 하고있으니

꼭 저에게 주십사 전화로 간청을 몇번이나

 드렸던 기억이 난다... 

 

그 늦은 시간, 원화도 안 보고 인터넷으로 숭례문 그림을 보고

 다짜고자 전화 통화로 나에게 그림을 달라고 하니

화백님께서 어찌 안 놀라셨을까?...

 

그 당시 나에게는 가보로 생각하니 사실 가격은 중요시 않았다.

 

 

(아주 답답하고 느리지만 옛날 방식 그대로 수 작업으로 한돌 한돌을 쌓아 복원해 가는 성벽들 ,인고의 세월이 느껴진다...)

 

다음날 화백님께서 나에게 전화를 주셨다...

 

몇사람이 그림을 원하지만 저에게 주시겠노라고...

 

나는 너무 기뻐 그 즉시 말씀하신 금액을 바로 송금을 드렸다.

 

가보로 생각하고 숭례문 펜화를 구입 하였으니 돈을 떠나

내가 어찌 화백님을 좋아하지 않으랴?...

 

몇년동안 숭례문 원본 그림은 나의 사무실에 걸려있었다.

 

숭례문 그림을 산지 몇달후 2008년2월10일부터11일까지

숭례문 화재가 나는 어처구니 없는 일이 발생 되었다.

 

나는 구입할 당시  국보1호때문에 숭례문을 구입 한것은 아니었다.

 

숭례문펜화가 신세계그룹과 중앙일보 지면에 대대적으로

선전되고 새롭게 조명되니 여기 저기서 내 그림인

숭례문 펜화 원본을 사겠다는 제의가 들어왔다...

 

나는 거절하였고 팔 생각이 없다...

 

올해도  어떤분이 내가 산 숭례문 그림값의 7배를 얹어 주겠다는

 제의도 가보로 넘겨 줄것이라고 정중히 거절하였다.

 

 나는 지금도 마찬가지 지만 그림을 투자 목적으로 산것은 아니었다.

 

남대문시장에 인접해있는 건축물이라는 단순한 생각 때문에

내가 은퇴후 뭔가 상징적인 가치를 가지고  아들에게

물려주려고 구입한 그림이었다.

 

나는 그림값도 오르고 해서 힐톤호텔에서 숭례문 복원기금을 위하여

 하트모양의 화강암을 3백만원을 주고 산 작품도 있다.

 

(나중에 그 작품에 대하여 소개할 예정이다...)

 

내가 김영택 화백님의 그림에 매료되어 몇점을 구입 하다보니

어느새 개인 소장자로써는 최대로 많이 소장하고 있다.

 

그림값이 올라가고 사무실이 비좁고 도난이 우려되어

작년에 대대적으로 아파트를 리모델링 하여

그림을 걸을수 있는 공간을 많이

 확보 하였다.

 

돈을 떠나 "숭례문"펜화는 내가 보고싶고, 만지고 싶고, 소유하고싶은,

생각을 실행하여 구입했다는 사실에 희열감을 느낀다...

 

나는 퇴근하여 집 현관에  들어서면, 첫번째는 하은이가 달려 나와 반긴다...

 

두번째는 내처와 아들 딸 자녀들이 반긴다.

 

세번째는  거실에 있는 숭례문을 한참을 쳐다본다...

 

왜냐고요?

 

미술품을 보면 마음이 편안하고 포근하다는 생각이 들고요!!

 

내가 가장 아끼는  소장목록 1호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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밑에 있는 글과 그림,사진은 김영택화백님이 보내주신 자료입니다....

 

제목: 김영택의 펜화기행4-숭례문
분류: 칼럼
이름: 8.김영택








조지 로스가 찍은 사진


조지 로스가 찍은 사진


 

1월 19일자 중앙일보 컬럼입니다.


1900년대의 남대문


  1957년 초등학교 수학여행 때 본 남대문(숭례문- 崇禮門)은 엄청 크고 웅장하게 보였습니다.
7층(21.47m) 높이였던 남대문은 당시 주변의 3~4층 건물을 압도하였지요.
지붕 용마루 좌우측에 세운 취두의 높이가 1.47m에 달합니다.
내림마루의 잡상도 9개로 경복궁 근정전과 경회루 보다 많습니다.
궁궐 외에는 단층건물만 있던 조선시대에 남대문은 최고층 건물로 수도 한양의 얼굴이었습니다.
4대문 중 으뜸 문이어서 중국의 사신만 남대문으로 들어오게 하고 왜국의 사신은 광희문을 이용하게 하였답니다.

  
  비슷해 보이는 동대문을 보물 제1호라 하고 남대문은 국보 제1호라고 하는지 아십니까?
남대문은 조선 초기 건물 중 임진왜란에도 불타지 않은 유일한 건물입니다.
태조 7년(1398)에 세웠고, 세종 30년(1448)에 개축하였으며, 성종 10년(1479)에 중수하였습니다.
6.25동란에 입은 상처로 1962년 보수를 할 때 태조, 세종, 성종 때의 상량문이 모두 발견되었습니다.
개축을 하면서 처음 썼던 목재를 그대로 이용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니 600살이 넘은 남대문과 고종 6년(1869)에 새로 지은 동대문은 나이만으로도 비교가 되지 않습니다.
크기도 동대문뿐만 아니라 수원 팔달문, 광화문 보다 큽니다.

  
  고종 37년(1900) 남대문 아래로 전차가 다니기 시작하였고
1907년 전차가 복선으로 확장 되면서 좌우측 성벽을 헐어내고 일본식으로 주변을 단장합니다.
조선의 상징과도 같았던 남대문은 이때부터
병사를 잃은 장군처럼 처연한 모습으로 길 가운데 홀로 서 있게 됩니다.
다행히 서울시에서 일본식 석재들을 걷어내고, 좌·우측 성벽을 일부나마 복원할 예정이랍니다.
얼마나 멋있어 질까요.
서울역 쪽에서 남대문 홍예밑을 지나 남대문 시장으로 걸어가는 것을 상상해 보는 것도 즐겁습니다.
복원에 문제가 되는 것은 ‘홍예밑의 바닥을 1.6m 아래에 있는 옛 바닥만큼 낮추어야 하는 가’와,
옛날처럼 ‘밤 9시 성문을 닫은 후에는 어느 통로로 다니게 하는 가’ 랍니다.

  
  펜화는 호주의 사진작가 조지 로스(George Ross 1861~1942)의 사진을 기본으로 하였습니다.
전봇대를 없에고, 1900년 이전의 모습으로 재현하였습니다.
성벽 위에 쌓은 성가퀴의 옥개석(지붕돌)이 없어진 것을 되살려 놓았습니다.
사진에서는 어두워 보이지 않는 지붕 밑의 처마 공포는 현 남대문을 참고하였습니다.
조선 초기에 지었기 때문에 고려시대의 건축 기법이 남아있는 소중한 문화재입니다.

  
  남대문 그림을 첫 회에 선보일 예정이었습니다.
그러나 작업 도중 잉크를 엎지르는 실수로 다시 그리느라 늦었습니다.
펜화(36×50cm) 한 점 완성하는데 15일 정도 걸리고, 펜 선은 50만 번 정도 긋게 됩니다.
남대문은 크고 복잡한데다 두 번 그렸으니 펜 선이 곱이상 들었습니다..

  
 

penwhaga@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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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에 그려진 숭례문 원화는 현재 내가 소장하고 있는 그림중에서도

 제일 첫번째로 애정을 가지고 있는 그림이다.

 

사업을 하면서 상징성을 갖는 그림을 찾다가 숭례문 그림을 선택하고 소장하였다.

아침 일찍 안방에서 일어나면 처음 접하는 그림이다.

 

사무실에서 보는 판화본이 크고 웅장하지만 나름대로 작지만 정교하게 그려진

원화에서 기쁨을 찾는다.

 

아무래도 남대문시장에서 50여년을 생활할것같다.

제2의 고향인 남대문 시장의 상징물인 숭례문이 어서빨리 복원되어

 

대한민국 국민의 품에 안 기는 그런날들이 빨리왔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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