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택의 펜화로 본 한국 / 인천 차이나타운
한국 최초의 철도는 인천 우각현(쇠뿔고개 현, 도원역자리)과 노량진 간의 33.8km로 1899년 9월 18일 개통 되었습니다. 다음해 5월 인천항까지 선로를 연장하였고, 7월에는 한강 철교를 준공하여 서울과 인천이 완전하게 연결됩니다.
종착지인 인천역 자리는 바다를 메워서 만든 간척지로 개통당시에는 역 뒤가 바다였으나 현재는 워낙 육지가 넓어져서 전혀 실감이 나지 않습니다. 1900년에 지은 인천역 건물은 한국 철도 역사(驛舍) 중 가장 오래된 역사입니다. 인천역의 출구를 빠져나오면 길 건너편에 화려한 중국식 패루(牌樓)가 눈길을 사로잡습니다. 중국 산동성 웨이하이시(威海市)에서 기증한 3개의 패루 중 가장 큰 것으로 제1패루라 합니다. 이 패루로부터 차이나타운이 시작되는데 인천에서 오래 산분들은 이곳을 청관(淸館)이라고 합니다.
패루 밑을 지나 언덕길을 오르면 붉은 기둥에 황색용이 조각된 가로등과 붉은 등이 달린 음식점에 각종 중국 상품을 파는 점포가 늘어서 있어 이국적인 정취에 빠지게 됩니다. 차이나타운에서 파는 보이차, 우롱차 등 각종 중국차와 다구는 종류도 많지만 값도 국내에서 제일 쌀 것입니다. 국화, 장미, 대나무 잎차가 50g 한 봉에 5.000원입니다. 대형 상가도 생겨 중국 전통 의상을 비롯하여 공예품, 장신구, 보석 등 진기한 상품들은 아이쇼핑만으로도 즐겁습니다. 새로 문을 연 한중문화관에서는 중국의 전통민속공연도 감상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관광을 즐기다가 배가 출출 해지면 화려한 실내장치로 중국 본토 분위기를 물씬 풍기는 식당에서 화교의 오리지널 중국 음식 솜씨를 맛보세요. 한국에서 중국음식의 대명사가 되어버린 자장면은 인천이 원조인 것을 아십니까? 1883년 인천이 개항한 후 인천항에서 일하던 중국 인부들을 위해 간이식으로 개발한 것입니다. 볶은 춘장을 삶은 국수에 얹은 값싼 음식이었습니다. 인천 차이나타운에서는 진짜 원조 자장면을 맛보실 수 있습니다. 이 자장면이 이제는 LA와 같은 미주 도시 뿐만 아니라 중국 본토에도 상륙을 하였답니다. 차이나타운에는 100년 이상의 역사를 지닌 식당들이 있어 정통 중국 요리를 제대로 만들어 냅니다. 할아버지 때부터 3대가 요리를 만들어온 태화원에서는 채식 중국요리도 나옵니다.
개항 이전의 인천항은 인구가 70여명에 불과 하였던 제물포라는 작은 포구였습니다. 그러나 1880년대에 들어서면서 육로를 이용하던 중국과의 교역이 선박의 발달로 해상교역으로 바뀌면서 인천은 서울의 관문 역할을 도맡게 됩니다. 1883년 1월 인천항이 개항 된 후 인천에는 일본. 중국 등의 조계(租界)가 생깁니다. 조선정부의 힘이 미치지 못하는 치외 법권 지대입니다. 인천역 앞 선린동 일대의 5.000여 평은 청국의 지계(地界)였고, 현재 인천시 중구청이 있는 중앙동과 관동 일대 7.000평은 일본의 조계였습니다. 그 외 지역에는 각국 공동 지계라 해서 미국, 영국 등 여러 나라의 영사관과 무역회사와 주택들이 들어섰습니다.
1900년경 청국 조계지에는 2.300여 명의 청국인이 거주하면서 요리집, 잡화상, 이발소 등을 열었습니다. 이 청국인 들은 98% 이상이 산동성 출신입니다. 산동성이 인천과 제일 가까웠거든요. 당시 청국 영사관 건물은 인천 상륙 작전 때 파괴 되었으나 복구하여 화교학교인 중산학교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이 학교에는 대만의 국기가 걸려 있습니다. 화교들이 공동 투자한 재산이어서 중국 정부도 어쩌지 못한답니다. 인천 차이나타운에는 현재 700여명의 화교가 있습니다. 그중 나이 많은 화교들은 대만 국적을 유지하고 있는데 대다수의 젊은이들은 중국에 출입 할 일이 많아서 중국 국적을 택하였답니다.
전 세계에 화교가 상권을 쥐고 있는 곳이 많습니다. 그런데 우리나라에는 큰 화상이 없습니다. 왜 그럴까요. 한국 정부가 화교들의 경제활동을 법으로 제약하였기 때문입니다. 부동산을 소유하지 못하게 하고 취업도 제한하였으며, 한국인으로 귀화도 받아주지 않았습니다. 이런 어려움 때문에 친한 한국인 명의로 땅을 사고 건물을 지었다가 송두리째 재산을 날려버린 경우도 많았고, 한국인 며느리 명의로 부동산을 사놓고 며느리 눈치를 보느라 며느리가 바람피우는 것도 못 본 척 하고 지낸 화교도 있었답니다. 이런 노골적인 차별로 많은 화교들이 대만과 남미 등으로 떠나 버렸습니다.
차이나타운에 있는 중국 절 화엄사 주지스님은 “화교들이 현금을 많이 숨겨 갖고 있다는 소문을 듣고 그 돈을 끌어내어 산업자금으로 만들려고 1962년 시행한 화폐개혁 때 단 한명의 화교만이 돈을 수레로 실어 날랐을 뿐 예상외로 저조 했던 것은 사실상 화교 중에 부자가 없었기 때문”이라고 하였습니다. 이제는 차별대우도 없어졌고, 인천시의 차이나타운 개발계획으로 많은 화교들이 이주해 올 것으로 기대합니다.
화엄사는 인천항 개항 이전인 1850년대에 창건한 국내 단 하나 뿐인 중국 절로서 오랫동안 의선당(義善堂)이란 이름을 갖고 소림사 무술인 십팔기를 연마하는 장소로도 이용 되었답니다. 한국말을 한국인 보다 더 구수하게 하는 신임 주지 스님은 무술을 금하고 절을 제대로 가꾸려고 애를 쓰고 있는데 오래된 법당의 지붕이 새서 큰 걱정이랍니다.
제 2패루에서 자유공원으로 오르는 길과 계단이 청국과 일본 조계의 경계선이었습니다. 인천 시에서 차이나타운을 개발하면서 계단 좌측에는 중국식 석등을 세우고 우측에는 일본식 석등을 세워 휴식 공간을 만들었습니다. 계단 꼭대기에는 공자 석상을 세웠는데 중국 청도시의 기증품입니다. 계단 초입 좌측에 화교가 사는 가옥이 원형에 가깝게 보전되어 있어 펜화에 담았습니다.
일본 조계지역에는 아직도 옛 건물들이 많이 남아있어 ‘장군의 아들’ 영화를 찍은 세트장을 보는 듯 합니다. 차이나타운을 보시고 시간이 남으면 월미도에 가서 바다로 지는 낙조를 보며 회를 드셔도 좋습니다, 주머니 사정이 여의치 못하면 연안부두에서 값싸고 싱싱한 회를 찾으세요.
그림. 글. 사진=김영택 펜화가(honginart2hanmail.net)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