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인사 일주문
작년 학고재 개인전을 보시고 “왜 절을 많이 그렸습니까?.”라고 묻는 분이 있었습니다. 우리나라 문화재 중 약 65%가 불교문화재입니다. 그러니 건축문화재 그림 열장을 그리면 그중 예닐곱 장은 사찰건물이 됩니다. 또 다른 이유는 주업으로 삼았던 디자인 사업을 접고 펜화로 전환한 다음 생활형편이 어려웠기 때문입니다. 절에서는 말만 잘하면 먹고 자는 것이 공짜거든요.
금년 초 해인사 주지스님께서 “이 사람이 우리 절은 왜 안 그리는고? 라고 하셨답니다. 해인사가 어떤 절입니까. 부처님 말씀을 담은 팔만대장경을 모신 법보사찰로 삼보사찰 중 하나요, 강원, 선원과 율원을 갖추어 한국 최초로 ‘총림(叢林)이 된지 40년이 된 절입니다. 그러니 이 절 저 절 그리면서 해인사를 빼먹었다고 꾸중을 들어도 싸지요. 그러나 사실은 두 번을 들렀으나 그림 구도가 보이지 않아 못 그린 것입니다. 다시 찾아가 주지스님께 그림을 그리겠다고 말씀 드린 후 절 구석구석을 돌며 구도를 찾아보았습니다.
해인사는 가야산의 강한 기운으로 팔만대장경을 보호하는 절입니다. 강한 기의 영향을 받는 해인사 선원은 참선 수행의 효과가 좋은 선원으로 알아줍니다. 스님들도 성격이 우락부락한 스님이 많습니다. 성철 스님의 성격도 대단했지요. 조계종단 주요 직책을 맡는 스님이 많은 것도 절터의 기 때문이라고 봅니다.
그런 때문인지 건물들도 딱딱한 분위기여서 구도를 찾지 못하고 쩔쩔 매기는 전과 다르지 않았습니다. 해인사에는 대장경을 보관한 장경각 외에는 오래된 건물이 별로 없습니다. 절의 중심이 되는 구광루는 새로 중건하면서 옛 분위기를 잃었습니다. 안타까운 일입니다. 새로 조각된 석물의 모양을 보면 화까지 치솟습니다.
절 뒷산으로부터 입구까지 샅샅이 뒤지다가 마음에 드는 구도를 찾았습니다. 일주문을 뒤에서 본 구도로 여태까지 그렸던 그림들과는 사뭇 다른 구도입니다. 그림은 1920년대 사진을 참고하여 고쳐 그렸습니다. 지금은 해강 김규진이 쓴 ‘가야산 해인사’라는 현판이 붙어 있으나 사진에는 해인사 홍하문(海印寺 紅霞門)이라고 내려 쓴 편액이 있었습니다. 문 좌우에 폭 7자쯤 되는 낮은 담도 있었습니다. 일주문은 사찰의 경내와 밖을 구분 짓는 상징적 건물인데 담장이 있으니 그 뜻이 명확해지고 정감이 있어 보입니다. 현재의 모습으로 바뀐 것은 1940년 변설호 주지 때 목수 이백화가 고쳐지었답니다.
해인사 앞 홍류동 계곡의 농산정(籠山亭)은 그냥 지나치기 쉬우나 꼭 찾아보세요. 최치원의 발길이 머문 곳이며, 멋과 운치가 있는 정자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