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강산 신계사
휴전선을 넘어 금강산에서 신계사(神溪寺)를 만났습니다. 6.25동란으로 삼층탑 하나만 남아있던 폐허에 13개 전각이 복원되어 옛 대찰의 영화가 아이맥스 화면으로 되살아났습니다. 절 앞으로 창터 소나무 군락이 천만 병사로 도열하였고, 그 너머로 금강산 집선연봉(集仙連峯)이 병풍처럼 장대하게 둘러섰습니다. 이처럼 기막힌 구도를 만나는 기회가 펜화가의 일생에 또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집선연봉과 여러 건물의 세밀한 묘사를 위하여 화폭을 넓게 잡았습니다. 세계에서 가장 가늘다는 펜촉을 사포에 갈아가며 연봉 하나하나와 기와 한 장까지 그렸습니다. 9월 18일 금강산에서 돌아와 달포를 그렸으니 다른 펜화보다 서너 배 공력이 든 셈입니다. 펜촉 60여개를 갈아가며 대략 200만 번이 넘는 펜선을 긋는 동안 집선연봉의 기운이 함께하여 피곤을 잊었습니다. 불가에서 말하는 환희심이 이런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2004년 4월 첫 삽을 뜬 뒤 4년 만에 이처럼 많은 당우를 중창한 사례는 2천년 한국불교 역사에 또 하나의 기록이 될 것입니다. 더욱이 남북이 힘을 합친 불사이구요. 남측에서 자금과 주요 자재, 기술자가 파견 되었고, 북측에서는 인부, 돌이나 흙과 같은 잡 자재를 부담하였습니다. 자금은 한국 불교종단, 정부, 현대아산이 분담하였습니다. 대략 남측 자금이 85억 원 정도 들었답니다. 이처럼 큰 공사를 남측 조계종단에서 도감(都監)으로 파견한 제정스님이 직원 한명 없이 혼자 총감독을 하였습니다. 북측 군사지역이라 온정리 현대 숙소에서 출퇴근을 해가며 온갖 난관을 해결한 대단한 스님입니다. 해인사에 출가하여 동국대학에서 불교미술 박사학위 과정에 있는 스님입니다. 공산주의의 게으른 타성에 젖은 북측의 인부를 부리기가 제일 어려웠고, ‘동무’들과 싸우는 일에 능숙해 졌답니다.
그림 우측으로부터 어실각, 조사당 겸 나한전, 대웅보전, 칠성각, 축성전, 극락전이 한 줄로 늘어섰습니다. 나한전 앞 ㅁ음자 건물이 요사채(스님들이 사는 곳)인 최승전이고, 그 왼쪽 칠성각 앞 누각이 만세루, 만세루와 축성전 사이에 지붕만 보이는 건물이 종각입니다. 종각 좌측 큰 건물이 공양간(식당)인 수승전이며 그 좌측 작은 건물이 수각 즉 우물입니다. 수승전 좌측 앞 건물은 창고입니다. 칠성각 뒤 건물(그림 오른쪽 하단)은 산신각인데 앉은 방향이 좀 틀어져 보이지요? 모든 건물은 동남향을 하였으나 산신각은 절 뒤의 주산인 하관음봉에 방향을 맞췄기 때문입니다.
신라 법흥왕 6년(519년) 보운(普雲)스님이 창건하여 효봉(曉峰) 한암(漢岩) 큰 스님이 수행하였던 신계사를 이제 다시 볼 수 있게 되었으나 그곳에서 남측의 ‘스님’을 만나게 될지 북측 ‘중선생’을 보게 될지 알 수 없습니다. 중창을 시작할 때 완공 후 관리 합의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무작정 지어놓고 보자는 것이 그동안 남측이 북쪽에 별려놓은 여러 가지 일들과 똑같아 보입니다. 내금강 표훈사 등의 절에 남측 관광객이 시주하는 달러화 때문에 중선생들이 서로 절 근무를 하고자 야단이랍니다. 그 통에 신계사에 남측 스님이 소임을 맡기가 어려울 것으로 봅니다. 현재와 같이 출퇴근을 해야 한다면 남측 스님들이 살기도 어렵구요. 금강산의 명찰인 신계사에서 큰스님의 인도로 여법하게 예불을 들이고 싶은 소원이 이루어 졌으면 좋겠습니다. 북측 불자와 함께라면 더 좋겠지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