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녕 관룡사
많은 절이 명산의 명당자리에 있습니다. 그 중에서 바위로 이루어진 영산(靈山)에 자리 잡은 절로 해남 달마산 미황사, 합천 황매산 영암사, 문경 희양산 봉암사, 창녕 화왕산 관룡사를 손꼽습니다. 거대한 바위산은 기가 엄청 쎈 장소로 수행자의 기도처로 좋습니다. 하나의 통 바위로 된 희양산의 봉암사를 조계종단 종립 선원으로 삼은 것도 그 때문입니다.
바위 연봉의 아름다움이 금강산에 맞먹는다는 달마산 미황사 펜화를 보고 고궁박물관 소재구 관장이 ‘사진으로는 제대로 담지 못하는 달마산을 제대로 그렸다.’고 하였습니다. 관장실 응접탁자 옆에 작품을 세워놓고 “내가 김화백의 광고를 하며 삽니다.”라고 해서 웃었습니다. 펜화가 사진보다 좋아 보이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펜이 사진보다 표현력이 좋아서 일까요? 아니지요.
미황사 같이 경사가 심한 곳에 자리 잡은 절의 좁은 마당에서 절과 산을 모두 사진에 담으려면 광각렌즈를 써야 합니다. 광각렌즈를 사용하면 가까운 피사체는 크게 찍히고, 먼 곳의 피사체는 작게 나옵니다. 그래서 미황사 사진에 달마산 연봉이 작고 보잘것없게 나오는 것입니다.
2004년 학고재 개인전에 동양철학을 한다는 나이 드신 분이 황매산 영암사지 펜화를 보고 “그림에서 황매산의 좋은 기가 강하게 나오니 팔지 말고 애들 공부방에 걸어놓으면 공부 잘 할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이미 팔린 뒤라 판화본을 막내아들 공부방에 걸었습니다. 2년 뒤 막내아들이 과학고를 나와 정보통신대학교에 조기 진학하였으니 효과를 본 셈일까요. (이 내용을 주간조선 연재 때 발표하였더니 ‘판화본을 사자’는 주문이 좀 있었습니다. 정보통신대는 정홍식 동기가 정보통신부에 있을 때 기획하여 만든 IT전문 특수 대학으로 모든 강의가 영어로 이루어 지며 100% 장학금에 100% 기숙사 생활을 합니다.)
중간색이 없는 펜화는 원근 표현이 제일 힘듭니다. 보통은 펜 선의 굵기로 조절합니다. 가까운 대상은 굵은 펜을 쓰고 먼 곳은 가는 펜을 씁니다. 황매산의 원경을 제대로 묘사하기 위해 세계에서 제일 가늘다는 펜촉의 끝을 사포에 갈아 0.05~0.07mm 굵기로 만들어 썼습니다. 묘사가 잘되면 그림에서도 기가 나오나 봅니다. 산속 토굴에서 수행을 하시는 큰스님이 저를 보고는 “그림의 대상인 영산의 기가 몸에 가득하여 무척 든든하니 계속 하시게.’’ 하셨습니다. 그림도 그리고 기도 얻는다니 참 ‘꿩먹고 알먹고’ 입니다.
신라 진평왕 5년(583)에 지었다는 관룡사(觀龍寺)도 영산으로 알아주는 화왕산(火旺山)의 기맥에 지은 절입니다. 비탈에 지은 절이라 사진으로는 화왕산의 아름다움을 제대로 담을 수가 없습니다. 펜화에는 화왕산의 전체 모습이 제대로 나오도록 구도를 만들었습니다.
화왕산을 세밀하게 묘사하는데 십 여일이 걸렸습니다. 화왕산을 그리면서 옛 이름인 화왕산(化王山)이 ‘기가 강한 산이란 뜻이 아닐까’ 생각 되었습니다. ‘불뫼’라는 이름이 실제 불을 뿜는 화산이어서 붙은 것은 아닐 것입니다.
기가 강한 장소에 지은 절에는 높은 도력을 지닌 스님이 없으면 절이 망하기도 한답니다. 신라 말 최고급 절로 지은 영암사가 고려 때 폐사가 된 후 되살아나지 못한 원인이 기가 너무 강한 자리이기 때문이랍니다. 미황사도 부임하는 스님마다 병이 나서 비어 있었습니다. 현재 주지인 금강스님은 종단에서도 알아주는 ‘기가 센 스님’입니다. 관룡사도 폭우에 22명의 스님이 떠내려가는 사고를 겪기도 했습니다. 숙종 30년(1704) 일입니다.
관룡사는 작지만 고졸한 분위기 때문에 다시 찾게 되는 절입니다. 사전에 전화로 취재 요청을 하고 찾아 갔는데 스님이 펜화가를 잘 알고 있었습니다. 관룡사가 통도사 말사이고, 스님은 통도사로 출가한 스님이니 펜화가를 모를 턱이 없지요. 덕분에 취재가 수월했습니다.
관룡사는 그 흔한 일주문이 없는 대신 잘 생긴 돌장승이 길손을 반깁니다. 대웅전은 태종 원년(1401)에 창건되어 임진란 때 불타고, 광해군 9년(1617)에 중건된 건물로 보물 제 212호입니다. 신라 흘해왕 40년(349)에 지었다는 약사전은 보물 제 146호로 화왕산의 기맥인 바위줄기가 바로 뒤까지 내려온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약사전이 임진왜란 때 왜군의 방화에 불타지 않은 것도 화왕산 강한 기맥의 혈(血) 자리에 지었기 때문이랍니다. 약사전에 모신 석조여래좌상은 보물 제 519입니다. 작은 절에 보물 3점이 있는 것은 관룡사가 여늬 절과 다른 절임을 보여 줍니다. 그러나 원음각에서 법고대를 보는 순간 보물이고 뭐고 다 잊어버리고 사랑에 빠져 버렸습니다. ‘이렇게 예쁜 법고대도 있구나’하는 감탄에 자리를 뜨지 못하였습니다.
관룡사에서 보는 이들의 넋을 빼앗는 것이 또 있습니다. 용선대(龍船臺)입니다. 절 마당을 지나 화왕산으로 20여분 올라가다보면 산 중턱 능선에 배 형상으로 솟은 큰 암석이 보입니다. 이 암반 위에 부처님 한분이 좌대에 앉아 너른 들판을 내려 보고 있습니다. 착하게 살고 좋은 일을 많이 한 사람이 죽으면 반야용선(般若龍船)을 타고 불국토로 간답니다. 용선대가 영락없이 반야용선 모양과 같습니다. 잘 생긴 부처님은 마치 반야용선의 선장 같아 보입니다. 그런데 깎아지른 절벽 좁은 바위 위에 큰 석조 좌대와 부처님을 올려놓은 드잡이(무거운 물건을 옮기거나 들어 올리는 장인)는 누구일까요. 대단한 드잡이 였을 것입니다. 보물 제 295호인 부처님과 용선대를 감상하기 좋은 자리도 있습니다.
늦가을 억새밭으로 유명한 화왕산과 관룡사를 함께 찾아보는 것도 좋은 답사 코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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