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표교
수표교는 청계천에서 가장 아름다운 다리입니다. 엄지기둥 12개 사이에 낮은 동자기둥을 세워 난간석을 받친 형태는 조선시대 돌다리의 모범입니다.
세종 3년(1421) 6월 나흘 동안의 폭우로 도성안은 물바다가 되어 75채의 집이 떠내려가고 많은 사람들이 죽습니다. 이 사고 후 10년간 청계천과 지류의 바닥을 파내고, 오간수문 옆에 이간수문을 더 내고, 중요다리 6곳을 돌다리로 고쳐 놓습니다. 수표교도 이때 세운 다리로 근방에 말을 매매하던 마전(馬廛)이 있어 마전다리라 하였습니다. 세종 23년(1441) 마전다리 옆에 치수가 새겨진 나무 수표(水標)를 세우고 개천의 수위를 임금에게 아뢰게 합니다. 이 후 수표교로 이름이 바뀝니다. 이 수표는 성종 때 돌로 바뀝니다.
영조 36년(1760) 인부 21만 명을 동원하여 대대적으로 준설을 하고 새 수표를 세웁니다. 이때 파낸 모래를 쌓은 가산(假山-현재 방산동))에 한양 거지들의 총 두목인 ‘꼭지딴’의 본영이 생깁니다. 광교나 수표교 등의 다리 밑에 사는 거지들을 ‘깍쟁이’라 불렀고 이들의 두목을 ‘꼭지’라 했습니다. 성 내외 여섯 명의 꼭지들이 모여 선출한 꼭지딴은 생사여탈권이 있어 기강이 엄했답니다.
당시 세도가 들이 정적을 염탐하려면 꼭지딴에 부탁을 합니다. 추석 등 명절이면 꼭지딴은 꼭지들과 좋은 옷을 차려입고 세도가 들에 세배를 다녔고, 세도가 에서는 넉넉한 세뱃돈을 챙겨 주었습니다. 또한 큰 잔치가 벌어지면 보호 해준다는 명목으로 돈을 받기도 했는데 이 행태는 해방 후에도 남아 있었습니다. 당시 한양 꼭지딴 조직은 엄청난 인원에 권력과 밀착 되어있어 나라에서도 손을 쓰기 어려워 내의원이나 혜민서에서 약으로 쓰는 두더지, 지네, 고슴도치 같은 것을 납품하는 권한을 주어 다스렸답니다. 꼭지딴이 운영하던 '수구문 추어탕'은 별미로 유명했는데 추어탕의 원조라는것을 아는 분이 많지 않습니다.
구한말 독립협회 회원들이 가두연설을 할 때 수구세력의 사주를 받은 꼭지딴의 부하들이 각설이 판을 벌이거나 뱀을 휘둘러 청중을 쫓아냈답니다. 정치깡패의 원조인 셈입니다.
수표교에서 숙종과 장희빈의 비극적인 러브스토리가 시작된 것을 아십니까? 수표교는 임금이 가장 많이 다니는 다리였습니다. 현재 중부 경찰서 자리에 역대 임금의 영정을 모신 영희전(永禧殿)이 있어 설날, 한식, 등 매년 여섯 차례 임금의 전배(展拜)를 위하여 왕의 거둥 행렬이 수표교로 왕래하였습니다.
볼거리가 적었던 조선 시대에 임금의 화려하고 장엄한 거둥은 대단한 구경거리여서 길거리는 인산인해를 이루었습니다.
숙종이 영희전 참배를 마치고 장통방을 지나가는데 별안간 바람이 불어 민가의 창에 걸었던 발이 떨어지면서 밖을 내다보던 아름다운 여인과 눈이 마주칩니다. 이 여인을 잊지 못한 숙종이 여인을 궁으로 불러들이니 그가 바로 장희빈이었답니다. ‘경성백승’에 실린 이야기입니다.
수표교 다리 주변이 무척 운치가 있었나 봅니다. ‘한경지락’에 “수표다리 동편 수십 보 되는 지점에 시금동(詩琴洞)이 있는데 삼연 김창흡이 친구들을 모아 시를 짓고 거문고를 뜯으며 놀던 곳이다”라는 기록이 있습니다.
혜풍 유득공은 ‘수표교 다리’라는 아름다운 시를 남겼습니다.
해지자 어둑어둑 연기도 꺼져가고
눈여겨 알겠구나 희미한 다섯째 다리
다리 위의 저 길손 누구인지 알 수 없어
몸 돌려 다시 보니 저 멀리 사라지네
向昏煙色淡粧消 微辨如紅第五橋
橋上行人雖未識 更堪回首望遙遙
구한 말 수표교 사진을 보면 여인들이 빨래하는 모습과 엄마를 따라온 아이들이 청계천에서 물놀이를 하는 정겨운 풍경을 볼 수 있습니다.
수표교는 1959년 청계천 복개공사로 신영동에 잠시 옮겨 갔다가 1965년 장충동에 자리를 잡습니다. 요즈음 청계천이 복원 되었으나 수표교는 제자리로 돌아오지 못합니다. 복원된 청계천의 폭에 비해 다리가 훨씬 길기 때문입니다.
다리 서쪽에 있던 수표(보물 제838호)는 세종대왕기념관으로 옮겨갔습니다. 영조 때 만든 수표로 순조 33년(1833) 개천 준설을 하다 발견하여 다시 세운 것입니다.
장충동 수표교는 그래도 명색이 수표교인데 수표가 없는 것이 어색합니다. 복제품이라도 곁에 세워두면 좋겠습니다.
* 이 글은 중앙일보 칼럼에 몇가지 이야기를 보탠 것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