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택의 펜화기행 5-펜으로 복원한 문화재
(중앙일보 3월 2일자 칼럼)
흥인문
서울의 성문 중 동대문이라 부르는 흥인문(興仁門)에만 옹성(甕城)을 두른 이유를 아십니까? 조선 태조 3년(1394) 한양으로 서울을 옮기고 2년 뒤 성곽을 쌓습니다. 성벽은 주산인 북악산(높이 342m) 능선을 따라 서쪽의 인왕산(338m), 남쪽의 남산(265m)으로 이어지는데 동쪽의 낙산(125m)이 가장 낮습니다. 그 낙산 끝자락에 세운 흥인문 자리는 넓은 평지여서 적의 공격에 가장 취약한 곳입니다. 그래서 성문 앞에 반원형 옹성을 둘러쌓아 성문으로 들어오려는 적을 앞뒤에서 공격할 수 있도록 했습니다.
그러나 흥인문은 임진왜란 때 전투 한번 못해보고 왜군에게 제일 처음 함락되는 치욕을 겪습니다. 다른 부대에 앞서 한양에 도착한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는 철옹성으로 보이는 흥인문에 겁을 먹고 선뜻 입성을 못합니다. 병사들이 모두 도망가 활짝 열린 문 안쪽엔 아무도 없었는데 말입니다. 함정일까 우려해 여러 차례 정탐꾼을 들여보낸 후에야 진입을 합니다. 예나 지금이나 아무리 좋은 시설을 갖췄다 해도 사람의 의지가 부족하면 무용지물입니다.
흥인문 자리는 습지대여서 생나무를 박고 장대석(사각형의 긴 돌)을 우물 정(井)자 형태로 여러 겹 쌓은 위에 지었습니다. 그러나 육중한 무게로 건물이 기울어 고종 6년(1869) 새로 고쳐짓습니다. 그래서 태조 7년(1398)에 지은 국보 제1호인 숭례문(崇禮門-남대문)보다 나이가 390살이나 적습니다. 문화재의 가치를 따질 때 제작 연대가 중요 요소가 됩니다. 이 때문에 숭례문 보다 격이 낮은 보물 제1호가 되었습니다. 조선 초기의 대표 건물인 숭례문에 비하여 조선 후기의 대표 건물인 흥인문의 부재들은 화려하나 나약해 보입니다. 국력이 약해지면 장인의 솜씨에도 힘이 빠지나 봅니다.
펜화에 담긴 흥인문은 1880년경의 모습입니다. 성 밖 허허벌판에 초가집 몇 채만 모여 있는 정경이 현재와 비교할 수가 없습니다. 성벽 앞의 밭은 미나리꽝이고 좌측 하단에 작은 수구가 보입니다. 낙산으로 이어지는 성벽은 복원되었습니다. 그림 속의 성벽이 현재 보다 훨씬 높아 보일 것입니다. 도로 포장 등을 하면서 흥인문이 어른 키만큼이나 땅속에 묻혔기 때문입니다. 2006년 실측 때 지표면 1.66m 아래에서 성문 바닥에 깔았던 박석이 발견된 사실이 이를 입증해 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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