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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보1호.숭례문 화재를 안타까워 하면서...
청정남
2008. 3. 5. 09:50
610년 대한민국 수도 서울을 지켜보고 서있던숭례문이 불타버리고 말았습니다.
축조당시 200년에서 300여년된 소나무로 축조하였던 천년의 역사는 후손들의 잘못으로
상처를 입고 쓰러지고 말았습니다.
소나무는 죽어서 천년 ..살아서천년...
이펜화를 공개하면서 역사앞에 머리숙여 사죄하는 마음 간절합니다.
아쉬운 마음을 간직하면서 볼로그에 펜화를 공개합니다.
그나마 제게는 숭례문이라는 펜화 원본이 있어서 매일 매일 처다봅니다.
김영택 화백님께서 중앙일보에 기재한 국보1호 숭례문 펜화 (원작) 을 작년에 구입하였습니다.
김영택 화백님의 50만번의 손이 가야하는 어려운 작품입니다.
김영택 화백님의 혼이 담겨있는 펜화 숭례문.....
아쉽지만 펜화로 나마 흔적을 남깁니다...
남대문에서 사업하는관계로 상징성있는 가치있는 것을 구하려다가
숭례문을 화백님께서 그리셔서 사정 사정 하여서 소장하게 되었습니다.
매일 매일 숭례문을 보다가 그나마 펜화로 안방 에서 감상을 하고 있습니다.
상당한 가격이지만 아쉽게 없어진 숭례문을 기억 하면서.....
제 자손과 후손에게 숭례문의 아품 이 있었다는 사실을
알리고 펜화로나마 한 페이지로 남김니다.
역사를 기억 하면서...........
2008년2월11일월요일 아침에..................... .2008년3월5일공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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숭례문
1957년 초등학교 수학여행 때 본 남대문(숭례문. 崇禮門)은 엄청나게 크고 웅장했습니다. 7층(21.47m) 높이였던 남대문은 당시 주변의 3~4층 건물을 압도하고도 남음이 있었지요. 궁궐 외에는 단층건물만 있던 조선시대 남대문은 한양의 얼굴이었습니다. 4대문 중 으뜸이어서 중국의 사신만 여기로 들어올 수 있었고, 왜국 사신은 광희문을 이용했다고 합니다.
비슷해 보이는 동대문은 보물 제1호, 남대문은 국보 제1호입니다. 남대문은 조선 초기작 중 임진왜란에도 불타지 않은 유일한 건물입니다. 태조 7년(1398)에 세웠고, 세종 30년(1448)에 개축했으며, 성종 10년(1479)에 중수했습니다. 한국전쟁 때 입은 상처로 62년 보수를 할 때 태조.세종.성종 때의 상량문이 모두 발견됐습니다. 개축을 하며 처음 썼던 목재를 그대로 이용한 것입니다 그러니 600살이 넘은 남대문과 고종 6년(1869)에 새로 지은 동대문은 나이만으로도 비교가 되지 않습니다.
남대문은 고종 44년(1907) 전차를 복선으로 확장하면서 좌우측 성벽을 헐어내고 일본식으로 주변을 단장했습니다. 이로써 조선의 상징과 같은 남대문은 병사 잃은 장군처럼 처연한 모습으로 길 가운데 홀로 서 있게 됩니다. 다행히 서울시에서 일본식 석재들을 걷어내고, 좌우측 성벽을 일부나마 복원할 예정이라니 기대가 크군요. 서울역 쪽에서 남대문 홍예밑(무지개 모양으로 만든 문의 아래쪽)을 지나 남대문시장으로 걸어가는 것을 상상해 보십시오. 즐겁지 않은가요. 복원에 문제가 되는 것은 '홍예밑의 바닥을 1.6m 아래 있는 옛 바닥만큼 낮춰야 하는가'와, 옛날처럼 '밤 9시 성문을 닫은 뒤에는 어느 통로로 지나다녀야 하는가'랍니다.
펜화는 호주의 사진작가 조지 로스(1861~1942)의 사진을 기본으로 했습니다. 전차용 전선이 없는 것을 보면 1900년 이전의 모습입니다. 성벽 위에 쌓은 성가퀴(성 위에 낮게 쌓은 담)의 옥개석(지붕돌)이 없어진 것을 되살려 놓았습니다. 사진에선 어두워 보이지 않는 지붕 밑의 처마 공포(처마 끝 하중을 받치기 위해 기둥머리 등에 짜맞춰 댄 나무 부재)는 현재의 남대문을 참고했습니다. 고려시대 건축 기법이 남아 있는 소중한 우리 문화재입니다.
김영택